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로마 진군 ==== 갈리아 전쟁 동안 카이사르는 계속된 승전보로 로마 시민들 사이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지만 제1차 삼두정치를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위험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BC 50년에 카이사르의 속주 총독 임기가 만료되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카이사르로서는 만약 자신이 군사 지휘권을 내어놓고 로마로 돌아온다면 차기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까지 아무런 공직을 갖지 않은 채 무방비로 적들을 상대해야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이미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군대 지휘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중재안으로 BC 49년 1월 1일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는 안을 원로원에 전달하였으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겠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내렸다. 평화적인 해결책이 사라지자 카이사르는 주저없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는 신속성을 위해 갈리아 군대 중 이탈리아에 가장 가까이 주둔 중이던 제13군단만 이끌고 BC 49년 1월 10일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라는 말과 함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넜다. 당시는 아직 군사행동에 적합하지 않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북이탈리아에서 숙영지를 편성하고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러한 로마 원로원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남하했다. 이와 함께 로마 안에서 호민관의 지위로 카이사르를 돕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원로원 최종권고 이후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하자 카이사르는 이 둘에게 각각 군사를 나누어 주어 안토니우스에게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하도록 했고 쿠리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페사로, 파노,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갑작스럽게 카이사르가 진군하고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카이사르에게 호응하여 쉽게 항복하자 놀란 로마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황급히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남하 중에도 지속적으로 폼페이우스에게 회담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아직 휘하에 제13군단 밖에 거느리지 못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숫적으로 폼페이우스가 훨씬 우세함에도 허를 찔린 폼페이우스로서는 군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브린디시에서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뚫고 그리스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내전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이제 내전의 장기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